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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문 골목에서

#1. 서점의 봄

by emilore 202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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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의 봄

 

아침 여덟시, 민호는 익숙한 소리에 잠을 깼다. 골목 어귀 카페에서 들려오는 원두 갈리는 소리였다. 이층 원룸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같았다. 좁은 골목 양편으로 늘어선 낮은 건물들, 그 사이로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낡은 원목 문짝을 밀어내며 민호는 오늘도 작은 서점 '책향'의 하루를 시작했다. 골목 안쪽 이층짜리 건물 한 모퉁이를 차지한 이곳은 그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지 벌써 삼 년, 처음엔 팔아버리려 했지만 결국 직접 운영하게 된 터였다. 당시 회사 동료들은 미쳤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적자가 뻔한 독립서점을 운영하겠다니.

 

하지만 민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평생 아껴온 책들을 그냥 처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골목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이곳은 단순한 상가가 아니라 추억이 깃든 공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네며 민호는 어젯밤 정리하다 만 신간들을 서가에 꽂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조용한 문학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좋은 책들을 버릴 수 없어 계속 들여놓고 있었다. 때로는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요즘 이런 책은 잘 안 팔려요"라며 걱정 섞인 조언을 하기도 했지만, 민호는 묵묵히 자신의 기준을 고집했다.

 

창가 독서 공간에서는 단골 할머니 한 분이 시집을 펼쳐 보고 계셨다. 김춘수의 '꽃'을 읽고 계시는 모습이 어린 시절 책 읽어주시던 어머니와 겹쳐 보였다. 민호는 조용히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드렸다. "감사해요, 사장님. 이 자리가 참 좋아요. 집에서는 손자들이 시끄러워서 책 읽기가 힘든데." 할머니의 미소에 민호도 살짝 웃어 보였다.

 

"천천히 보세요.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민호의 말에 할머니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순간들이 민호에게는 서점을 계속 운영하는 이유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여기에 있었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 햇살이 서가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민호는 카운터에 앉아 새로 들어온 시집을 읽고 있었다. 황지우의 시집이었는데, 그 중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질까?' 시인의 물음이 그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스물아홉,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선택을 미뤄온 세월이 문득 아쉬웠다.

 

대학 때 사귀던 여자친구는 그의 신중함을 답답해했다. "민호야, 너는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 가끔은 충동적으로 살아봐도 괜찮아." 하지만 민호는 그럴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지켜본 후 그는 늘 안전한 길만을 택해왔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것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믿어왔다.

 

종이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진흙이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조심스럽게 둘러보고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었고, 맨 얼굴에도 건강한 생기가 돌았다. "죄송한데요, 혹시 도예 관련 책이 있나요?" 맑은 목소리에 민호는 고개를 들었다.

 

"이쪽입니다." 민호가 안내한 곳은 예술 서적 코너였다. 그리 크지 않은 코너였지만 도예, 조각, 회화 관련 서적들이 나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여성은 책들을 하나씩 넘겨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일본 도예가의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집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좋은 책들이 많네요. 맞은편에 공방을 열었거든요. 아직 많이 부족해서 이론 공부도 필요하고..." 그녀의 말에 민호는 "새로 오신 분이시군요.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라고 답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정수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요"라고 인사했다.

 

계산을 마친 후 수아가 나가자, 민호는 창밖을 바라봤다. 정말로 맞은편 한 달째 비어있던 상가에 '수아도예공방'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 옆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고, 바람에 날리는 작은 깃발이 생기를 더했다. 새로운 이웃이 생긴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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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은 서점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아직 학교에 있고, 직장인들은 일터에서 바쁜 시간. 민호는 이 시간을 이용해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거나 독서를 했다. 오늘은 유독 창밖이 신경 쓰였다. 공방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판을 보며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해질 무렵, 골목에 노을빛이 스며들 때쯤 공방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클래식도 재즈도 아닌,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였다. 민호는 모르는 사이에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서점 문을 닫으며 민호는 다시 한번 맞은편을 바라봤다. 공방 창문 사이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안에서는 누군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마 수아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골목을 걸어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민호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따라 골목이 조금 더 따뜻해 보였고, 혼자 사는 일상이 그리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자 공방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민호는 잠시 그 소리를 들으며 내일 아침에도 그 여자가 서점에 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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