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만남
토요일 오후, 민호는 서점 문을 열어둔 채 새로 들어온 사진집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평소보다 손님이 많아져서 진열을 더 신경써야 했다. 특히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골목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민호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대학 동기였던 오지훈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들어오고 있었다. 삼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지훈이? 어떻게 여기까지?"
"너 여기서 서점 한다는 소식 들었어. 궁금해서 찾아왔지." 지훈은 서점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분위기 정말 좋다. 역시 너답네. 아, 그리고 이번에 개인전 준비하는데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지훈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나름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특히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 몇 번 그룹전에도 참여했다고 들었다. "무슨 부탁인데?"
"이번 전시 주제가 '골목의 사람들'이야. 이 골목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싶거든. 너도 촬영 모델 중 한 명이 되어줬으면 해." 지훈의 제안에 민호는 당황했다. "나는 사진 찍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그리고 맞은편 도예공방 사장님도 섭외하려고 해. 혹시 안면이 있어?" 지훈의 말에 민호는 수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책 사러 오신 적이 있긴 한데..."
"완벽하네! 그럼 같이 가서 인사하자. 너도 모델 하기로 하고." 지훈은 민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어쩔 수 없이 민호도 따라 나섰다.

공방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물레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수아가 작업복을 입고 나타났다. 머리에는 흙가루가 묻어 있었고, 앞치마에는 여러 색깔의 흙이 묻어 있었다. 민호를 보자 수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서점 사장님?"
"네, 안녕하세요. 이쪽은 제 친구 오지훈이에요. 사진작가시고요." 민호의 소개에 지훈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이 골목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협조해주실 수 있을까요?"
수아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카메라를 보며 약간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사진전이요? 어떤..."
"일상적인 작업 모습을 담고 싶어요. 특별한 포즈나 연출은 전혀 없고요. 그냥 평소처럼 작업하시는 모습만." 지훈의 설명에 수아는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제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부끄러운데." 수아의 말에 민호가 끼어들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정말 진지하게 작업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분명 좋은 사진이 될 것 같은데."
민호의 말에 수아는 살짝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도움이 된다면."
"정말 감사해요!" 지훈이 기뻐하며 카메라를 만졌다. "그럼 우선 오늘은 간단히 공간 촬영부터 할게요. 작업 모습은 다음에 따로 약속 잡고요."
지훈이 공방 곳곳을 촬영하는 동안, 민호와 수아는 조금씩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공방 분위기가 어떠세요? 수강생들이 많이 오나요?"
"아직은 몇 분 안 계세요. 그래도 관심 보이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수아는 작업대에 놓인 찻잔을 보며 말했다. "서점은 어떠세요? 요즘 독립서점이 운영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맞아요. 쉽지 않죠. 그래도 좋은 책들을 소개할 수 있어서 보람은 있어요." 민호는 수아가 만든 찻잔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 예쁘네요. 직접 만드신 거죠?"
"네. 아직 구워지지 않아서 부서지기 쉬워요. 조심스럽게 만져주세요." 수아가 찻잔을 조심스럽게 민호에게 보여줬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살짝 닿았고, 둘 다 약간 당황한 듯 손을 뒤로 뺐다.
"와, 분위기 좋은데?" 지훈이 카메라를 내리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아니야?" 농담처럼 던진 말에 민호와 수아는 동시에 얼굴이 빨개졌다.
"지훈아, 그런 소리 하지 마." 민호가 당황하며 말했지만, 지훈은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 좋은데. 한 장만?"
찰칵. 플래시가 터지며 두 사람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담겼다. "야! 갑자기 왜 찍어!" 민호가 항의했지만 지훈은 벌써 카메라 액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대박, 정말 좋게 나왔네. 이거야말로 진짜 골목의 사람들이지." 지훈이 만족스러워하는 동안, 수아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자연스러운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촬영을 마친 후 세 사람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혼자 시간을 보내던 민호에게는 오랜만의 사교 시간이었다. "수아씨는 언제부터 도예를 시작하셨어요?"
"대학교 때부터니까... 한 칠 년 정도 됐나요? 중간에 프랑스에서 공부하기도 했고요." 수아는 커피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프랑스 이야기는 자세히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프랑스요? 대단하네요. 어떤 학교에서 공부하셨어요?" 민호의 질문에 수아는 잠시 침묵했다. "장식미술학교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될까요?"
민호는 수아의 표정에서 뭔가 아픈 기억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물론이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냥... 아직 정리가 안 된 일들이 있어서." 수아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지훈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끼어들었다. "그럼 전시회 얘기를 해볼까? 이번 전시 제목이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인데, 두 사람의 작업 공간과 일상을 중심으로 구성하려고 해."
"전시회는 언제 열리나요?" 수아가 관심을 보였다.
"다음 달 말 예정이에요. 홍대 근처 갤러리에서. 두 사람도 오프닝에 와야 돼요." 지훈의 말에 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자리 별로..."
"안 돼. 주인공이 빠지면 어떡해. 수아씨도 꼭 오세요. 약속해요." 지훈이 강하게 요청했고, 수아는 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가고 싶어요. 민호씨도 가시죠. 함께요."
수아의 말에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가죠."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민호는 서점으로, 수아는 공방으로, 지훈은 다음 촬영 장소를 찾아서. 헤어지면서 수아가 민호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좋은 친구를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저도요.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네요." 민호의 말에 수아는 밝게 웃었다. "네, 그럼요. 내일도 서점에 들를게요. 새로 나온 도예 책이 있는지 확인하러."
그날 밤 민호는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 지훈이 찍은 사진 속 수아의 미소가 자꾸 떠올랐다. 맞은편 공방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들렸다. 어쩌면 봄이 정말로 찾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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