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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문 골목에서

#2. 공방의 문을 열다

by emilore 202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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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방의 문을 열다

 

새벽 다섯시, 수아는 잠에서 깼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조용한 새벽에 흙을 만지는 것, 그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만의 의식이었다.

 

공방 한편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맞은편 서점은 아직 문이 닫혀 있었고, 골목은 고요했다. 어제 그 서점 사장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조용하고 신중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도 성의껏 안내해주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 냄새만큼은 프랑스에서나 여기서나 똑같았다. 수아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며 지난 이년간의 시간을 떠올렸다. 파리 장식미술학교에서의 마지막 해, 지도교수였던 장 피에르 마르탱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정씨, 당신의 작품에서는 영혼을 느낄 수 없어요. 기법은 괜찮지만 감정이 없다고요. 예술은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진정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때 수아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밤낮없이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만든 작품들이 한순간에 무가치해지는 느낌이었다. 졸업 전시회에서도 다른 학생들의 작품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흙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은 공방을 얻어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엔 다를 거야." 수아는 속으로 다짐하며 물레 앞에 앉았다.

 

첫 번째 흙덩이를 물레 위에 올렸다. 발로 페달을 밟자 물레가 돌기 시작했고, 젖은 손으로 흙을 감쌌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아가며 형태를 만들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골목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카페에서는 원두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분주해졌다. 수아는 작업을 멈추고 창문을 열었다. 봄바람이 공방 안으로 들어와 흙먼지를 날렸다.

 

맞은편 서점에 불이 켜졌다. 어제 그 사장이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큰 편이었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것이 책을 많이 읽는 사람 같았다. 그는 서점 앞을 쓸고 있었는데, 가끔 수아의 공방 쪽을 힐끗 보는 것 같았다.

 

 

오전 열시, 공방 문을 열었다. '수아도예공방'이라고 직접 써서 붙인 간판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아직 정식으로 수업을 받겠다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첫 번째 손님은 근처에 사는 중년 여성이었다. "여기서 도예 수업을 받을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에게 수아는 반갑게 인사했다. "네, 물론이에요. 언제든 오세요." 간단한 상담 후 그녀는 다음 주부터 수업을 받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골목이 한적해졌다. 수아는 간단히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오늘은 찻잔을 만들고 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균형감과 실용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물레를 돌리며 수아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배운 정교한 기법에 한국적인 소박함을 더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르탱 교수의 말과는 달리,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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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은 시간, 공방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수아가 좋아하는 요요 마의 첼로 연주였다. 음악과 함께 물레 돌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곤 했다.

 

맞은편 서점에서도 누군가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창문이 열리면서 클래식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수아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장이구나 싶어 미소를 지었다.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게 반가웠다.

 

해질녘, 오늘 만든 작품들을 정리하며 수아는 뿌듯함을 느꼈다. 찻잔 두 개와 작은 화분 하나가 완성되었다. 아직 초벌구이 전이라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지만, 형태는 마음에 들었다. 특히 찻잔의 곡선이 자연스러워서 만족스러웠다.

 

공방을 정리하다 보니 창밖으로 서점 사장이 보였다. 그는 문 앞에 놓인 책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책들을 하나씩 펼쳐보며 배치하는 모습이 정성스러워 보였다. 수아는 내일 다시 서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예 역사에 관한 책이 더 필요했다.

 

밤이 되어 공방의 불을 끄기 전, 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골목에 가로등이 켜지고, 각 상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서점에서도 노란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사장이 독서를 하거나 정리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수아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느꼈다. 파리에서의 좌절이 아직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이 작은 골목에서라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흙냄새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하루가 그녀에게는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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