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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문 골목에서

#5. 작은 균열

by emilore 2025.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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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은 균열

 

지훈의 전시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민호와 수아는 더 자주 만나야 했다. 전시에 함께 소개될 두 사람의 작업 공간과 일상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색함은 여전했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수요일 오후, 지훈이 제안한 것은 '협업 사진'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담고 싶어. 민호는 수아의 도예 작업을 보고, 수아는 민호의 서점 일을 도와주는 식으로."

 

민호는 처음 수아의 작업실에서 그녀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집중해서 흙을 다루는 그녀의 손길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어떠세요?" 수아가 작업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민호는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격식적이었다. "이렇게 정교한 작업을 하시다니."

 

수아는 민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예의바르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박물관에서 작품을 구경하는 관람객 같았다. "별거 아니에요. 아직 많이 부족해서..."

 

"아니에요. 정말 완벽해요." 민호가 다시 칭찬했지만, 그 순간 수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완벽해요.' 그 말이 수아의 가슴을 찔렀다. 프랑스에서 마르탱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씨, 당신의 작품은 기술적으로는 완벽해요. 하지만 그게 문제라고요. 완벽한 기술 뒤에 숨은 당신의 감정을 찾을 수 없어요."

 

"완벽하다고요?" 수아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스며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민호는 수아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다. "네, 그런데...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아니에요. 완벽하다니, 좋은 말씀이죠." 수아는 차갑게 웃으며 작업복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아씨, 혹시 제가..." 민호가 다가가려 했지만, 수아는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민호씨는 정말 완벽한 분이시네요. 항상 정중하고, 예의바르고, 실수도 안 하시고."

 

그 말투에는 비꼼이 섞여 있었다. 민호는 더욱 당황했다. "저는 그냥..."

 

"그냥 뭐죠? 그냥 완벽하게 살고 계신 거죠?" 수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항상 안전한 말만 하시고, 위험한 건 절대 안 하시고. 그게 그렇게 편하세요?"

 

지훈이 상황을 파악하고 개입했다. "잠깐,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아는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촬영은 다음에 하죠."

 

수아가 나간 후 민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칭찬을 한 것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낸 건지...

 

"형, 뭔 일 있었어?" 지훈이 물었지만, 민호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민호는 서점에 혼자 앉아 계속 그 상황을 떠올렸다. '완벽하다'는 말이 왜 수아를 화나게 했을까? 그는 진심으로 칭찬한 것뿐이었는데.

 

민호의 문제는 그가 너무 신중하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항상 무난한 말만 했다. 진짜 감정이나 생각은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만 예의바른 말들을 반복했다. 수아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공방으로 돌아간 수아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민호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말 완벽해요.' 마르탱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감정이 없다고.

 

수아는 자신이 만든 찻잔들을 보며 괴로워했다. 정말 이 작품들이 완벽하기만 한 걸까? 감정이 없는 차가운 작품일까? 민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사실 수아가 화가 난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민호의 완벽하고 신중한 모습이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처음엔 예의바르고 친절했지만, 나중에는 그녀를 평가절하하고 무시했던 사람들. 민호도 똑같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민호는 평소보다 일찍 서점을 열었다. 혹시 수아가 올까 봐서였다. 하지만 수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때도, 오후에도 공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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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지훈이 서점에 나타났다. "형, 수아씨 만났어?"

 

"아니... 어제 이후로 못 봤어." 민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내가 수아씨랑 얘기해봤는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너도 너무 예의바르게만 대하지 말고 좀 더 솔직해져봐."

 

"솔직하게요?"

 

"응. 너 원래 그런 애 아니잖아. 대학 때는 할 말 다 하고 살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어?" 지훈의 말에 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그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수아씨도 힘든 게 있는 것 같아. 프랑스에서 뭔 일 있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말 안 해주더라." 지훈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수아에게서 아픈 기억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아씨가 상처받은 건 분명하니까."

 

그날 저녁 민호는 용기를 내어 공방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만, 수아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수아씨... 죄송해요. 제가 뭔가 잘못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민호는 문 너머로 말했다. "대화할 수 있을까요?"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수아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뭘 잘못하셨는지 모르신다고요?"

 

"정말 모르겠어요. 가르쳐주세요." 민호의 솔직한 대답에 수아는 잠시 망설였다.

 

"들어오세요." 수아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공방 안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아가 화가 나서 던진 것들인 듯했다. 민호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깨달았다.

 

"저는..." 민호가 말을 시작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동안 그는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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