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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문 골목에서

#6. 지훈의 다리

by emilore 2025.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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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훈의 다리

 

공방 안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민호는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수아는 작업대에 기대어 서서 그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더욱 높아진 것 같았다.

 

"저는..." 민호가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수아가 먼저 말했다.

 

"그냥 가세요. 오늘은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침이 배어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민호는 더 이상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방을 나섰다. 골목을 걸으며 그는 자신의 무력감을 절실히 느꼈다. 좋은 의도였는데 왜 이렇게 모든 것이 꼬여버렸을까.

 

그날 밤 민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아의 차가운 표정과 깨진 도자기들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지만, 꿈속에서도 수아가 나타나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민호는 평소보다 늦게 서점을 열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창밖을 보니 공방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수아도 밤새 잠을 못 잤을까?

 

오후가 되어서야 지훈이 나타났다. "형, 얼굴이 왜 그래? 밤새 안 잤어?"

 

"응... 어제 수아씨한테 갔었는데,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민호는 어제 있었던 일을 지훈에게 털어놓았다.

 

지훈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씨도 어제 밤에 나한테 전화했어. 울면서."

 

"정말? 뭐라고 했어?" 민호의 목소리에 급함이 묻어났다.

 

"자세한 건 말 안 해줬는데, 프랑스에서 상처받은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나에 대해서?"

 

"좋아하긴 하는데, 동시에 무서워하는 것 같아. 또 상처받을까 봐." 지훈의 말에 민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녁이 되자 지훈이 제안했다. "오늘 밤에 우리 셋이서 만나자.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수아씨가 나올까?"

 

"내가 설득해볼게. 너도 준비해둬. 오늘 밤은 정말 솔직하게 얘기해야 돼."

 

 

밤 열시, 골목 끝 작은 술집에서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수아는 여전히 민호를 직접 바라보지 않았다. 지훈이 소주를 따르며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일단 건배부터 하자. 우리의 어색한 만남에." 지훈의 농담에 민호는 억지로 웃었지만, 수아는 무표정이었다.

 

첫 번째 잔을 비운 후 지훈이 본격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 다 답답해 죽겠다. 서로 좋아하면서 왜 이러고 있어?"

 

"누가 좋아한다고 했어?" 민호가 당황해서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

 

"티 나거든. 둘 다." 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민호는 수아씨 생각에 밤잠도 못 자고, 수아씨는 민호 때문에 작업에 집중도 못 하고."

 

수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과 상처받는 것은 별개예요."

 

"무슨 상처?" 지훈이 물었다.

 

"사람들이 처음엔 다 친절해요. 관심도 보이고, 칭찬도 해주고. 그런데 나중에는..."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결국 다 떠나가요. 제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면."

 

민호는 수아의 말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지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민호씨도 그럴 거예요." 수아가 계속했다. "지금은 완벽하다고 말하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 부족한 모습들을 보게 될 거고, 그럼..."

 

"아니야." 민호가 끊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

 

"어떻게 확신해요?"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 깊게 숨을 쉬었다. "사실 나도 완벽하지 않아. 전혀."

 

지훈이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나는..." 민호가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항상 실수할까 봐 무서워.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 그래서 안전한 말만 하고, 위험한 건 피하고... 그런 게 습관이 됐어."

 

"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그때 우리 가족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봤거든.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도. 그래서 나는 절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수아가 처음으로 민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까..." 민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진짜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진짜 감정이 뭔지도 모르겠어. 수아씨한테 완벽하다고 말한 것도, 사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무난한 칭찬만 한 거야."

 

술집에 침묵이 흘렀다. 지훈이 조용히 소주를 따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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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교수님이 있었어요. 처음엔 저를 정말 인정해주시는 것 같았어요. 재능이 있다고,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민호와 지훈이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데 졸업 작품 심사 때..." 수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 작품을 보고 말하시더라고요. 기술은 완벽하지만 영혼이 없다고. 감정이 없다고. 예술가가 되려면 더 많이 아파봐야 한다고."

 

"그래서?"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요. 정말 제 작품에 감정이 없는 건가? 제가 부족한 건가? 민호씨가 완벽하다고 말씀하실 때... 그 교수님 말이 떠올랐어요."

 

민호는 이제야 왜 수아가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했다. "미안해. 나는 정말로 네 작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한 것 같아."

 

"아니에요. 민호씨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예민하게 반응한 거죠."

 

지훈이 개입했다. "두 사람 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오해였으니까."

 

"그런데 민호씨..." 수아가 민호를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항상 안전하게만 살아야 한다고?"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렇게 사는 게 오히려 더 외로운 것 같아."

 

"외로움..." 수아가 중얼거렸다. "저도 그래요.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다 보니까, 정말 혼자가 됐어요."

 

두 번째 병을 비우고 나자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지훈이 화장실에 간 사이, 민호와 수아는 처음으로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수아야..." 민호가 처음으로 반말을 했다. "나는 네가 완벽해서 좋은 게 아니야. 불완전해도 괜찮아."

 

"정말?"

 

"응. 사실 완벽한 사람이 더 무서워.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거든." 민호의 솔직한 말에 수아가 작게 웃었다.

 

"민호도..." 수아도 반말로 바꿨다.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마. 나도 네가 실수하는 모습 보고 싶어."

 

"실수하는 모습?"

 

"응. 그래야 진짜 민호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지훈이 돌아와서 두 사람의 변화된 분위기를 보고 흐뭇해했다. "훨씬 좋아졌네. 이제야 사람 같아."

 

"지훈아, 고마워." 민호가 진심으로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뭘. 친구 좋은 일 생기는데 도와주는 거 당연하지." 지훈이 웃으며 마지막 소주를 따랐다. "그런데 이제 진짜 시작이야. 서로 솔직해지기로 한 거니까."

 

그날 밤 세 사람은 새벽 두 시까지 술집에 앉아 있었다.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고, 진짜 친구들이 된 것 같았다. 특히 민호와 수아 사이에는 이전과는 다른 따뜻함이 흘렀다.

 

골목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아가 민호에게 말했다. "내일 공방에 와볼래?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네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정말? 나 같은 사람 의견이 도움이 될까?"

 

"될 것 같아. 네가 보는 시각이 궁금해." 수아의 미소에 민호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럼 내일 오후에 갈게."

 

"약속이야."

 

그날 밤 민호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들었다. 창밖 공방에서는 여전히 불빛이 보였지만, 이제는 그 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훈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진짜 소통의 첫걸음을 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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