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음의 틈새
수아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확실히 달라졌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민호는 매일 오후 잠깐씩 공방에 들러 수아의 작업을 지켜보거나 간단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일주일 후, 지훈이 흥미로운 제안을 가지고 나타났다. "두 사람 협업하는 건 어때?"
"협업?" 민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점이랑 도예공방이 무슨 협업을 해?"
"책과 도자기 전시회야. '읽는 그릇, 담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수아가 만든 찻잔이나 화분과 어울리는 시집이나 에세이를 민호가 선별해서 함께 전시하는 거지."
수아가 관심을 보였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맞아. 그리고 관람객들이 실제로 수아의 찻잔에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거야. 오감으로 즐기는 전시." 지훈이 자세히 설명했다.
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책을 제대로 선별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할 수 있어." 수아가 격려했다. "네가 책에 대해서 얘기할 때면 정말 생생해. 그 책이 왜 좋은지, 어떤 감정을 주는지... 나도 읽고 싶어질 정도로."
"정말?"
"응. 그리고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해. 내 작품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책이라는 이야기가 더해지면..." 수아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읽는 그릇, 담는 이야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매일 오후 한 시간씩 만나서 전시 계획을 세웠다. 수아는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고, 민호는 각 작품과 어울리는 책들을 선별했다.
"이 찻잔에는 어떤 책이 어울릴까?" 수아가 연한 청자색 찻잔을 들고 물었다.
민호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윤동주 시집은 어때? 이 찻잔의 은은한 색깔이 그의 시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윤동주?"
"'별 헤는 밤' 같은 시를 읽으면서 이 찻잔에 차를 마시면... 정말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아." 민호가 시집을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수아는 민호가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모습이 좋았다. 평소의 조심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그럼 이 화분은?"
"음..." 민호가 수아가 만든 거친 질감의 화분을 보며 생각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 화분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느낌이 성장의 아픔을 다룬 소설과 잘 맞을 것 같아."
"와, 정말 잘 어울린다." 수아가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연결을 생각해내?"
"그냥... 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아. 각각의 작품이 가진 느낌이나 이야기가 있어서."

작업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인정하게 됐다. 민호는 수아의 작품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 읽어낼 수 있었고, 수아는 민호가 선별한 책들이 자신의 작품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정말 대단해." 어느 날 수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책으로 완성시켜주는 것 같아."
"나도 그래. 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책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나오는 것 같아." 민호도 진심으로 답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함께 재료를 사러 나가고, 전시 공간을 둘러보고, 늦은 밤까지 작업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목요일 저녁, 두 사람은 공방에서 작업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전시 오픈이 일주일 후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떨려." 수아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볼까... 또 실망스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민호는 수아가 여전히 프랑스에서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을 거야."
"어떻게 확신해?"
"우리가 함께 만든 거니까." 민호가 따뜻하게 웃었다. "혼자가 아니잖아."
그 말에 수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정말 혼자가 아니었다. 민호가 있었고, 지훈도 있었다. 무엇보다 민호와 함께 만든 이 전시는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함께 해줘서.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인데."
"나도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카페 안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무언가 특별한 감정이 흘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을 걸으면서 수아가 말했다. "민호야, 나 요즘 정말 행복해."
"나도."
"전시가 잘 되든 안 되든 상관없어. 이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워."
민호는 수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보다는 함께 하는 이 시간 자체가 소중했다.
"수아야..."
"응?"
"이번 전시가 끝나도...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민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냥... 이런 협업 말고도. 우리..." 민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도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확실하지 않았다.
수아는 민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정말?"
"응. 너와 함께 있으면... 편해. 그리고 용기가 생겨."
"나도 그래. 네가 있으면 뭔가 새로운 일에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전시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더 분명해진 것 같았다.
수아는 공방에서 마지막 작품을 다듬으며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기쁨. 그리고 그 누군가가 민호라는 안전함.
민호도 서점에서 전시용 책들을 최종 정리하며 마음이 벅찼다. 혼자 안전하게만 살아온 그에게 수아와의 협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있었다.
일주일 후면 전시가 열린다. 두 사람의 첫 번째 협업이자,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 될 전시.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 날을 기다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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