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꽃핀 골목(완결)
"전시 취소하면 안 될까?" 수아의 말에 민호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민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말이 맞을 것 같아. 내 작품들이 정말 부족한 건 아닐까? 사람들이 보고 실망하면..." 수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민호는 수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수아야, 그 사람 말은 잊어버려."
"하지만..."
"아니야." 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작품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누구야? 나야. 그리고 지훈이도, 공방에 오는 사람들도 모두 네 작품을 좋아해."
수아는 고개를 들어 민호를 바라봤다.
"그 교수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진심으로 만든 거잖아." 민호가 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준비한 이 전시가 얼마나 특별한지 너도 알잖아."
그때 지훈이 공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무슨 일이야? 분위기가..."
민호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지훈이 화를 냈다. "그런 놈이 있어? 수아야, 그런 말 듣고 포기하려고?"
"지훈아..." 수아가 힘없이 말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리고 네 작품들 정말 좋아. 내가 사진으로 담으면서 계속 감탄했거든."
"정말?"
"당연하지. 특히 민호랑 함께 만든 그 기울어진 화분? 그게 제일 멋있어. 완벽한 것보다 훨씬 살아있어 보여."
수아는 지훈의 말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야," 지훈이 계속했다. "예술이라는 게 누군가 한 명이 '이게 맞다'고 정하는 게 아니야.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지. 그 교수 말이 전부가 아니라고."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포기하면 그 사람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거야. 그럼 안 되지."
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서 계속해야 할까?
"수아야." 민호가 다시 말했다. "네가 처음 서점에 왔을 때 기억나? 도예 책을 찾으면서 '아직 많이 부족해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응..."
"그때 네 표정이 정말 진지했어. 뭔가 간절한 게 느껴졌고. 그래서 나도 더 좋은 책들을 찾아서 추천해주고 싶었어."
수아는 그때를 떠올렸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
"그리고 네가 물레를 돌릴 때 보이는 집중하는 모습, 작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모습... 그런 게 다 거짓말이야? 의미 없는 거야?"
"아니야."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끝까지 해보자. 우리가 함께 준비한 전시, 끝까지 해보자." 민호의 눈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수아는 공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만든 작품들, 민호가 선별한 책들, 그리고 함께 준비한 모든 것들. 정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별로라고 하면?"
"그럼 어때?"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우리가 진심으로 준비했다는 거지."
"그리고," 민호가 덧붙였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했으니까 괜찮아. 혼자가 아니잖아."
수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서서히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 해보자."
이틀 후, '읽는 그릇, 담는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작은 갤러리였지만 민호와 수아가 정성스럽게 꾸민 공간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입구에서부터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와, 이거 정말 신선한 아이디어네." "찻잔이랑 시집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수아는 긴장한 채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봤다. 한 중년 여성이 수아의 청자 찻잔을 들고 윤동주 시집을 읽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 여성이 수아에게 말했다. "이 찻잔에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읽으니까 더 깊이 느껴져요."
"감사합니다." 수아가 수줍게 대답했다.
"특히 이 화분이 인상적이에요." 한 대학생이 기울어진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벽하지 않은데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요."
수아는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민호가 처음 그렇게 말해줬던 화분을 다른 사람들도 같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민호는 책 코너에서 관람객들에게 작품과 책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거친 질감의 화분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매치했어요. 성장의 아픔과 강인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잘 어울리네요. 어떻게 이런 조합을 생각하셨어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 감정을 책으로 연결한 거죠."
지훈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진짜 예술이야."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전시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마르탱 교수가 나타난 것이다.
수아는 그를 보자 다시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민호가 바로 옆에 있었고,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마르탱은 조용히 전시장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찻잔에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모습, 화분을 만지며 감탄하는 모습들을 지켜봤다.
수아는 용기를 내어 마르탱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어떠세요?"
마르탱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예상과 다르군요."
"어떤 면에서요?"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체험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잠시 망설였다. "감정적으로 연결되고 있고요."
수아는 마르탱의 말에 놀랐다.
"특히 저 화분," 마르탱이 기울어진 화분을 가리켰다. "기술적으로는 불완전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요."
"교수님..."
"제가 틀렸을 수도 있겠네요." 마르탱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고 늘 가르쳤으면서, 저만의 기준으로 판단했나 보군요."
수아는 마르탱의 변화에 깊이 감동했다.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술들이 바탕이 되었어요. 그 위에 제 이야기를 올린 거죠."
"그렇군요." 마르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작업하세요. 당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같으니까."
마르탱이 떠난 후, 수아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마지막 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품을 감상하고, 실제로 몇 개의 작품이 판매되기도 했다.
전시가 끝난 후, 민호와 수아는 골목 끝에서 마무리 정리를 했다. 봄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를 스쳤다.
"정말 고마워." 수아가 민호에게 말했다.
"뭐가?"
"모든 게. 함께 해줘서, 믿어줘서, 지켜줘서."
민호는 수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고마워. 네가 있어서 이런 멋진 일을 할 수 있었어."
"민호야..."
"응?"
"우리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이런 협업 말고도... 그냥 함께."
민호는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싶어. 정말로."
"나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골목에는 봄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고, 서점과 공방의 불빛이 따뜻하게 어우러졌다.

"수아야, 사랑해." 민호가 처음으로 고백했다.
"나도 사랑해." 수아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들의 첫 키스는 골목 끝, 봄바람과 함께 이루어졌다. 책향기와 흙냄새가 섞인 그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다.
며칠 후, 골목에는 새로운 간판이 걸렸다. '책향 & 수아공방 - 이야기가 있는 공간'. 두 사람은 서로의 공간을 연결하여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점에서 책을 사고, 공방에서 도예를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고, 도자기를 만들며 시를 들을 수 있는 공간. 완벽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공간.
어느 일요일 오후, 민호는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수아는 공방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서로의 모습이 보였고, 때때로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지훈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이거야말로 진짜 골목의 사람들이지."
골목에는 완전한 봄이 찾아왔다. 흙냄새와 책냄새, 그리고 사랑의 향기가 어우러진 따뜻한 봄이. 민호와 수아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일구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았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순간들이 있고, 불안한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아름다웠다. 서로의 틈새를 메우며, 함께 성장해가는 사랑이었다.
골목 끝에서 시작된 작은 사랑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었다. 책과 흙, 조심스러움과 용기, 상처와 치유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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