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시 찾아온 그림자
전시 개막을 사흘 앞둔 월요일 아침, 수아는 공방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작품들이 전시장으로 옮겨질 예정이었고, 민호가 선별한 책들도 함께 배치될 계획이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가는 상황에서 수아는 처음으로 진짜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잘 될 것 같아." 수아가 혼자 중얼거리며 자신이 만든 찻잔을 하나씩 확인했다. 각각의 작품마다 민호가 매칭한 책들을 떠올리니 전시회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졌다.
오전 열시쯤, 공방 문이 열렸다. 수아는 민호가 온 줄 알고 밝게 웃으며 돌아봤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민호가 아니었다.
"장 피에르..." 수아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마르탱 교수가 서 있었다. 회색 정장에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한 그가 공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수아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작업대에 손을 짚었다.
"정수아 씨, 오랜만이네요." 마르탱 교수의 프랑스어가 공방 안에 울렸다. "한국에 잘 정착했나 보군요."
"어떻게... 왜 여기에?"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시아 도예 리서치 차 한국에 왔어요. 우연히 당신이 여기서 작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마르탱이 작업대 위의 작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아는 마르탱이 자신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이고 어설프게 느껴졌다.

"흠..." 마르탱이 찻잔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여전히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작품들을 보니 파리에서 배운 기법들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당신만의 이야기는 없어 보이네요." 마르탱이 차갑게 평가했다.
수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데, 마르탱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뭐죠?" 마르탱이 민호와 함께 만든 기울어진 화분을 가리켰다.
"그건..." 수아가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실수작인가요? 이런 걸 전시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마르탱의 말에 수아의 가슴이 무너졌다. 그 화분은 민호가 아름답다고 했던, 불완전해서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했던 작품이었다.
"저... 저는..."
"정수아 씨." 마르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럽습니다. 파리에서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군요."
수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난 몇 달 동안 민호와 함께 쌓아온 자신감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진짜 예술가가 되려면 안전지대에서 나와야 해요. 이런 소박한 작업실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 큰 무대에 도전해야죠." 마르탱이 계속해서 말했다.
"안전지대라고요?" 수아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작은 전시회 하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죠. 진짜 실력이 있다면 파리나 뉴욕 같은 곳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 순간 공방 문이 열렸다. 민호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수아야, 커피 사왔... 어?"
민호는 수아의 창백한 얼굴과 낯선 외국인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 분이?" 마르탱이 민호를 보며 물었다.
"저... 저는 민호라고 합니다. 수아의..." 민호가 어떻게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 남자친구인가 보군요." 마르탱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 이런 안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거군요."
민호는 마르탱의 말투에서 수아를 무시하는 뉘앙스를 느꼈다. "죄송한데, 누구신지...?"
"마르탱 교수님이에요."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스에서... 제 지도교수셨던 분."
민호는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수아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바로 그 교수가 나타난 것이다.
"아, 수아의 스승이시군요." 민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스승이라..." 마르탱이 콧웃음을 쳤다. "제가 가르친 게 얼마나 남아있는지 의문스럽네요."
민호는 마르탱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참았다. 대신 수아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수아의 작품들 정말 아름다워요." 민호가 조용히 말했다. "특히 이번 전시 작품들은..."
"전시요?" 마르탱이 관심을 보였다. "어떤 전시인가요?"
"책과 도자기를 함께 전시하는 거예요. 수아의 작품과 제가 선별한 책들을..."
"아, 그런 아마추어적인 전시 말이군요." 마르탱이 손을 흔들며 무시했다. "정수아 씨, 그런 식으로는 발전이 없어요. 진짜 예술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민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수아의 작품을 그렇게 평가하실 권리가 있으신가요?"
"권리라고요?" 마르탱이 민호를 노려봤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당신은 뭘 아시나요?"
"전 전문가는 아니지만, 수아의 작품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봐요. 완벽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웃기는 소리군요.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교수님!" 수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공방에 침묵이 흘렀다.
"그만 해주세요."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확고했다. "제 작품을, 제 친구를 모독하지 마세요."
"모독이라고요? 저는 객관적인 평가를..."
"아니에요." 수아가 마르탱을 똑바로 바라봤다. "교수님이 말하는 건 평가가 아니라 폄하예요."
민호는 수아가 자신을 지켜주는 모습에 감동했다. 동시에 그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수아 씨, 현실을 직시하세요. 이런 곳에서..."
"이런 곳에서도 제가 행복해요." 수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기준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소중한 곳이에요."
마르탱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파리에서의 수아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우는 학생이었는데, 지금의 수아는 달랐다.
"그리고..." 수아가 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호는 제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교수님이 폄하할 권리가 없어요."
민호는 수아의 말에 가슴이 벅찼다. 그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당신의 가치는 누구의 말로도 줄어들지 않아요." 민호가 수아에게 말했다. "당신의 작품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진실해서 아름다워요."
마르탱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네요."
그는 공방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현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예술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거든요."
마르탱이 나간 후, 공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아는 작업대에 기대어 서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아?" 민호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미안해..." 수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가 모욕당하게 해서."
"그런 건 상관없어. 너는 괜찮아?"
수아는 대답 대신 민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호야... 전시 취소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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