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숨겨진 상처
다음날 오후, 민호는 약속한 대로 공방을 찾았다. 어제의 솔직한 대화 후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기분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수아가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
"왔구나. 들어와." 수아의 목소리에는 어제와는 다른 따뜻함이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화분을 만들어보려고 해. 좀 특별한 모양으로."
"특별한 모양?"
"응. 완전히 둥글지도 않고, 완전히 각지지도 않은... 뭔가 자연스럽게 불완전한 느낌의." 수아가 설명하며 스케치북을 보여줬다. "어제 네 말을 듣고 생각해봤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 말."
민호는 수아의 스케치를 보며 감탄했다. 기존의 정형화된 화분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곡선이 살아있었다. "정말 아름다워. 이런 발상은 어떻게 한 거야?"
"사실..." 수아가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에 있을 때 만든 작품들은 전부 완벽한 형태만 추구했어. 교과서에 나오는 표준적인 모양들. 그런데 그게 문제였나 봐."
민호는 작업대에 앉아 수아가 흙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제와는 달리 그녀의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 민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물레 돌리는 거 도와줄래? 페달을 일정하게 밟아주면 돼."
민호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수아의 지시에 따라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물레가 돌아가면서 수아의 손 위에서 흙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갔다.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민호가 물었다.
"완벽해." 수아가 대답하고는 잠시 손을 멈췄다. "아, 미안. 또 그 말 했네."
"괜찮아." 민호가 웃었다. "이번엔 정말 좋은 의미로 들려."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중, 수아의 손이 갑자기 흔들렸다. 형태가 완성되어가던 화분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
"괜찮아. 다시 하면 되잖아." 민호가 격려했지만, 수아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이래. 거의 다 완성될 때쯤 실수하게 돼." 수아가 한숨을 쉬며 물레를 멈췄다.
"그럼 그대로 두자."
"뭐?"
"이 모양도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민호가 기울어진 화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완벽한 원형보다 훨씬 개성 있어."
수아는 민호의 말에 놀란 듯 작품을 다시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이런 건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기 어려워. 자연스러운 실수가 만들어낸 예술 아닐까?"
그 순간 수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마워... 그런 말 해줘서."
작업을 마친 후 두 사람은 공방 한쪽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골목에는 저녁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민호야..." 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프랑스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사실 더 있어."
"듣고 싶어. 네가 말하고 싶다면."
수아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마르탱 교수님... 처음 일 년 반 동안은 정말 좋았어. 나를 인정해주시고, 다른 학생들보다 관심도 많이 주시고."
민호는 조용히 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에..."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어. 내 작품을 볼 때마다 고개를 저으시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예시로 들어서 뭐가 잘못됐는지 설명하시고."
"그랬구나..."
"나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밤새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지. 그런데 더 열심히 할수록 교수님은 더 차갑게 대하셨어." 수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계속했다.
"그러다 졸업 전시 전에... 개인 면담을 했는데." 수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말하시더라고. '정씨, 당신은 예술가가 될 수 없어.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진짜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겠느냐'고."
민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말을 들은 수아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됐다.
"그때 나는..." 수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내가 그동안 뭘 한 건지, 내 인생이 뭐였는지..."
"수아야..." 민호가 다가가려 했지만, 수아는 손을 들어 말렸다.
"아직 다 안 끝났어. 더 있어." 수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 후에 졸업 전시가 있었는데, 다른 학생들 작품은 다 관심을 받았지만 내 작품만... 아무도 보지 않았어.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어."
공방에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골목의 소음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거야?"
"응. 그냥 도망쳐온 거지. 부모님은 처음에 화내셨어. 그렇게 돈 들여서 유학 보냈는데 뭐 하고 온 거냐고." 수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민호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의 말들이 너무 가볍게 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 수아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너를 만났어. 처음에는 또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무서웠어. 친절하게 대해주다가도 나중에는 실망하실까 봐."
"그래서 그렇게 거리를 뒀구나."
"응. 특히 네가 완벽하다고 말했을 때... 마르탱 교수님 말이 떠올랐어. '기술은 완벽하지만 감정이 없다'고 했던 말."
민호는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다. 수아가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왜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는지.
"수아야." 민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교수 말이 틀렸어."
"어떻게 확신해?"
"네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어. 진짜 감정이 담겨 있어." 민호가 공방 곳곳에 놓인 수아의 작품들을 가리켰다. "이 찻잔들, 화분들... 다 따뜻해. 만든 사람의 마음이 느껴져."
수아는 민호의 말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민호가 계속했다. "설사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완벽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그래."
"정말?"
"응. 오히려 불완전해서 더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 오늘 만든 화분처럼." 민호가 기울어진 화분을 가리켰다. "이게 완벽한 원형보다 훨씬 매력적이야."
수아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다시 바라봤다. 민호의 시각으로 보니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그 교수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진심으로 만든 거잖아." 민호의 말에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얘기 누구한테도 안 했는데."
"말해줘서 고마워.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해가 완전히 진 후, 민호는 서점으로 돌아갔다. 오늘 수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어린 이해였다.
그리고 수아도 혼자 공방에 남아 오늘 만든 화분을 바라봤다. 기울어진 모양이지만, 오늘따라 그 불완전함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민호의 말이 맞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생각했다. 수아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은 후의 홀가분함을 느꼈고, 민호는 수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기쁨과 동시에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 진정한 친밀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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