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편지 한 장
축제 이후 며칠이 지나자, 아린은 도현의 기록실이 자꾸 궁금해졌다. 그가 매일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화요일 오후, 아린은 용기를 내어 기록실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현이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오늘의 날씨와 바다 상태를 기록하는 것 같았다.
"안녕. 바쁜 시간에 방해한 건 아니지?" 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앉아." 도현이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주었다. "차 마실래? 커피 아니면 녹차."
"녹차 마실게."
도현이 차를 우리는 동안 아린은 서가를 둘러보았다. 정말 많은 기록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각 장부에는 연도와 월이 적혀 있었고, 별도의 파일들도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 모든 걸 혼자 다 기록해?" 아린이 감탄하며 물었다.
"응. 처음엔 아버지가 시작하셨는데, 돌아가신 후에 내가 이어받았어." 도현이 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실 기록하는 것 자체가 좋아. 매일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글로 남기는 거니까."
아린은 도현이 펼쳐놓은 오늘의 기록을 보았다. 단순한 수치뿐만 아니라 바다의 색깔, 파도의 패턴, 심지어 새들의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되게 자세하게 쓰네. 이런 것까지 기록해야 해?"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도현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바다랑 대화하는 기분이야. 매일 달라지는 표정을 읽어주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아린은 도현의 바다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두렵고 원망스러운 바다가 그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혹시..." 도현이 서가로 가서 한 권의 노트를 꺼냈다. "이것도 보여줄게. 공식 기록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쓰는 일기 같은 거야."
노트를 받아든 아린은 겉표지를 보았다. '바다 일기'라고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니 도현의 깔끔한 글씨로 날짜와 함께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2018년 3월 15일. 오늘 바다는 특별히 조용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등대 불빛이 바다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말씀하신 '바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린은 몇 페이지를 더 넘겨보았다. 모든 글이 바다에 관한 것이었다. 날씨와 파도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느끼는 감정, 바다에 대한 철학적 생각들까지 적혀 있었다.
"2019년 7월 3일.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는 마치 화가 난 사람이 진정하는 것 같다. 거친 파도가 점차 잔잔해지면서 평화를 되찾아간다. 하지만 바다 밑 깊은 곳에는 여전히 소용돌이가 남아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2020년 4월 20일. 오늘은 바다가 유난히 푸르다. 봄이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 바다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글을 읽어가면서 아린은 도현의 바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시에 어떤 집착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바다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2021년 항목에서 아린의 눈이 멈췄다.
"2021년 8월 12일. 오늘로 준이가 떠난 지 8년이 되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바다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아린이는 아직도 바다를 원망하고 있을까.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내가 그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자꾸 하게 된다."
아린의 손이 떨렸다. 도현이 매년 준이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동시에 그가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린아..."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부분은 안 봐도 돼."
하지만 아린은 계속 읽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더욱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날의 바다는 평소보다 거셌다. 파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유독 강한 조류가 있었다. 내가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준이를 물에서 끌어올렸을 때의 그 무게감, 차가움이 아직도 손에 남아있다."
아린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도현이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그가 8년 동안 계속 그 기억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읽지 마." 도현이 노트를 가져가려 했지만, 아린은 손을 뻗어 막았다.
"왜 이런 걸 써놨어?" 아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잊을 수가 없어서. 기록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져서."
아린은 노트를 덮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8년 동안 숨겨온 고통이 느껴졌다. 자신만 아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현도 똑같이 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일을 정확히 기억해?" 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1분 1초까지."
"그럼 이제 말해줄 수 있어?"
도현은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더니 깊은 숨을 쉬었다. "응. 이제 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기록실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8년 동안 묻어둔 진실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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