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색한 인사
기록실에서 돌아온 후 아린은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도현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막상 마주치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어색했다. 그의 "할 말이 있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이틀 후, 아린은 마을 슈퍼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냉장고가 비어있어서 기본적인 식료품들을 사야 했다. 계산대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도현이었다. 손에는 라면 몇 개와 우유 한 팩을 들고 있었다.
"어, 안녕." 아린이 뒤돌아보며 인사했다.
계산을 마치고 슈퍼를 나오자,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시간 있으면... 커피 한 잔 할까? 새로 생긴 카페가 괜찮다고 해서."
아린은 잠깐 망설였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대화해야 할 일이었다. "좋아."
마을 중심가에 새로 생긴 카페는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인테리어는 깔끔했지만, 손님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실래?" 도현이 물었다.
"아메리카노면 돼."
도현이 주문을 하러 간 사이, 아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 어선들이 점처럼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마음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커피를 가져온 도현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컵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시 생활은 어땠어?"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바빴어. 병원에서 간호사 일 했거든." 아린이 간단히 대답했다.
"힘들었겠네. 간호사 일이 쉽지 않다고 들었어."
"응. 그래서 그만뒀어." 아린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지친 일상과 우울했던 시간들을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도현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계속 있었어. 대학은 부산에서 다녔지만, 졸업하고 바로 돌아왔어."
"해양학과였다고 했지?"
"응. 원래 바다가 좋았으니까. 그리고..." 도현이 말을 잠깐 멈췄다. "아버지 일을 이어받아야 했고."
아린은 도현의 아버지를 기억했다. 과묵하지만 친절했던 등대지기 아저씨. 그런데 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셔?"
도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어."
"아..." 아린이 놀라며 말했다. "미안해, 몰랐어."
"괜찮아. 병으로 돌아가셨어. 마지막까지 등대 일을 놓지 않으셨지만." 도현이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이어받은 거야. 등대 관리와 기록 일까지."
아린은 도현이 혼자서 그 모든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전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이렇게 책임감 있는 일을 맡고 있다니.
"힘들지 않아?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
"처음에는 힘들었지. 하지만 이제 익숙해졌어. 그리고..." 도현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바다를 지켜보는 일이 의미 있게 느껴져."
그 말을 들으며 아린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도현에게 바다는 지켜야 할 대상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두렵고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린은 한참을 망설였다. 도시에서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지쳐버린 마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그냥... 쉬고 싶어서. 도시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그날 일에 대해서..."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직은 얘기하기 싫어." 아린이 빠르게 말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응, 알겠어. 급하지 않으니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너도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
아린은 대답하지 않고 커피잔을 돌렸다. 도현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그가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집은 괜찮아? 오랫동안 비어있었는데." 도현이 화제를 바꿨다.
"청소하고 정리하니까 살 만해.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어."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마을이 예전보다 더 조용해졌거든."
"괜찮아. 혼자 있는 게 편해."
도현은 아린의 말을 듣고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아린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신 후,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고, 바다에는 저녁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쪽으로 가야 해." 아린이 집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조심히 가. 그리고..." 도현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언제든지 기록실에 놀러 와. 혼자 있으면 답답할 텐데."
"고마워. 그럼 이만."
아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도현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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