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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1부: 귀향과 낯선 재회_#3. 등대지기의 서재

by emilore 2025.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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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등대지기의 서재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아린은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12년의 세월 동안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대로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에만 있으면 자꾸 과거의 기억에 휩싸일 것 같았다.

 

마을 중심가로 향하는 길에는 예전보다 펜션과 카페가 늘어나 있었다.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 같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다. 슈퍼마켓 앞에서는 할머니 몇 분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린을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린이 맞지? 많이 컸네. 도시에서 고생 많았겠다."

 

할머니들의 따뜻한 인사에 아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과 잠깐 안부를 나눈 후, 아린은 해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로 이어지는 길은 예전과 똑같았다.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방파제를 지나 등대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아린은 작은 간판을 발견했다. '해안 기록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궁금함에 이끌려 그 방향으로 걸어가니, 등대 관리소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건물이었다.

 

문 앞에 다가가니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낮은 남자 목소리였는데, 뭔가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린은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가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책상에는 두꺼운 장부들과 날씨 관측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아린의 심장이 쿵 뛰었다. 강도현이었다. 12년 전보다 키가 더 커져 있었고, 어깨도 넓어졌지만, 집중해서 글을 쓰는 모습은 여전했다. 안경을 쓴 모습도 예전과 똑같았다.

 

도현은 큰 장부에 뭔가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펜을 들고 있는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때때로 창밖을 바라보며 바다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다. 그의 옆에는 망원경과 풍향계, 기압계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린은 문을 두드릴까 망설였다. 갑자기 만나면 서로 어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망설임보다 컸다. 도현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기록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곧 문이 열리고 도현이 나타났다. 그는 아린을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린아?" 도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안녕, 도현아. 오랜만이야." 아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언제 왔어? 소식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전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어제 왔어. 이게 뭐야? 기록실이라고 써있던데."

 

도현은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더 활짝 열었다. "들어와 봐. 설명해줄게."

 

기록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다 냄새와 함께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벽면의 서가에는 연도별로 정리된 장부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1985년부터 시작해서 올해까지, 각 해마다 두꺼운 장부 몇 권씩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아린이 물었다.

 

"바다와 날씨 기록이야. 매일의 파도 상태, 바람 방향, 기온, 강수량...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있어." 도현이 설명했다. "어부들한테 도움이 되고, 나중에 연구 자료로도 쓸 수 있거든."

 

아린은 펼쳐진 장부를 보았다. 도현의 단정한 글씨로 상세한 관측 기록이 적혀 있었다. 날짜, 시간, 파고, 풍속, 시야... 모든 것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한 거야?"

 

"대학 졸업하고 나서. 원래 해양학을 전공했거든. 등대 관리 일과 함께 하고 있어."

 

도현의 설명을 들으며 아린은 놀랐다. 예전에 조용하고 책을 좋아하던 도현이 이런 체계적인 일을 하고 있다니. 그는 정말 바다와 가까운 삶을 선택한 것 같았다.

 

"혹시..." 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2년 전 기록도 있어?"

 

도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서가로 가서 한 권의 장부를 꺼냈다. 2013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그때 기록이야."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그때부터 기록을 시작했어. 아버지가 등대지기였는데, 나한테 일을 맡기면서 같이 시작한 거야."

 

아린은 그 장부를 바라보았다. 준이가 사고를 당한 그날의 기록도 그 안에 있을 것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졌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일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평온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 평온함이 오히려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시간 될 때 다시 올게." 아린이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

 

"응, 그래. 조심히 가." 도현이 문까지 따라 나왔다.

 

아린은 언덕을 내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도현은 여전히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아린은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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