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온 바닷가
버스가 마을 입구에 멈췄을 때, 윤아린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12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낮은 담장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소금기 섞인 바람이 버스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그 냄새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가씨, 종점입니다." 기사가 친근하게 말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작은 여행가방 하나뿐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온 것치고는 너무도 가벼운 짐이었지만, 마음만큼은 무거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다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는 소리, 갈매기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어선 엔진 소리까지.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아린은 잠깐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마을을 둘러보니, 변한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새로 지어진 펜션 몇 채가 눈에 띄었고, 예전에 있던 구멍가게는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표정과 느긋한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아린을 알아본 몇몇 아주머니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만 살짝 숙이고 지나쳤다.
집까지는 도보로 십 분 거리였다. 골목길을 돌아 언덕을 오르니, 익숙한 파란 대문이 보였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문고리도 녹슬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린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어머니가 보내준 열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습기와 곰팡이, 그리고 시간이 쌓인 냄새. 아린은 재빨리 창문들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바닷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와 정체된 공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거실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12년 전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소파 위에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고, 식탁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유리창에 낀 먼지 때문에 얼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아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동생 준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열 살이던 자신과 여덟 살이던 준이가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아린은 그 사진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부엌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다행히 물이 나왔다. 녹물이 먼저 나왔지만, 곧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아린은 컵에 물을 받아 마시고 나서, 본격적으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옷가지 몇 벌과 간단한 세면도구, 그리고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침실로 들어가니 이불에서 오래된 냄새가 났다. 아린은 이불과 베개를 모두 마당에 널어두고, 걸레로 방 안을 닦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니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갈 무렵, 아린은 마당에 나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수평선 저편에서는 어선 몇 척이 귀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도시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픔도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아린은 바다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그 말 속에는 다짐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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