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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1부: 귀향과 낯선 재회_#2. 빈집의 기억

by emilore 202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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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빈집의 기억

 

첫날 밤은 생각보다 깊었다. 아린은 새로 갈아입은 침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 때마다 집이 삐걱거렸고, 그 소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꾸만 불러일으켰다.

 

예전에는 이 소리가 무서워서 준이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곤 했었다. 준이는 겁이 많아서 조금만 바람이 세게 불어도 아린의 팔을 붙잡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아린은 누나답게 "괜찮다, 그냥 바다 아저씨가 우리한테 인사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었다.

 

아린은 베개를 뒤척이며 그 기억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빈집의 정적은 오히려 과거의 목소리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설거지 소리, 마당에서 아버지가 그물을 손보며 흥얼거리던 노래, 그리고 준이의 웃음소리까지.

새벽 두 시쯤 되어서야 아린은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가니, 달빛이 창을 통해 바닥에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먼지가 춤추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아린은 문득 준이의 방이 궁금해졌다. 12년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그 문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가를 몇 번 반복한 후, 마침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책상 위에는 준이가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침대 맡에는 그가 아끼던 축구공과 장난감 자동차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벽에는 준이가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 포스터들이 빛바랜 모습으로 붙어 있었다.

 

아린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림을 들어보니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서툰 솜씨였지만, 파란 크레파스로 정성스럽게 칠해진 바다 위에는 하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그림 한구석에는 삐뚤빠뚤한 글씨로 '누나랑 배 타고 싶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린은 애써 참았다. 대신 그림을 가슴에 꼭 안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준이는 항상 바다를 무서워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했다. 특히 아버지의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준이의 일기장이 나왔다. 아린은 망설였지만, 결국 첫 페이지를 펼쳤다. 어린아이다운 짧은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오늘 누나가 학교에서 상 받았어요.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큰 고기를 잡아왔어요. 맛있었어요." "바다가 무서웠지만 누나 손을 잡으니까 괜찮았어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준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사고 며칠 전에 쓴 글이 있었다. "내일 바다에 가요. 누나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무섭지만 용기내볼게요." 그 글을 읽는 순간, 아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날 자신이 준이를 말렸다면. 만약 혼자 바다에 가지 못하게 했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린은 일기장을 덮고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12년이 지났지만, 죄책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노라니, 벽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똑딱, 똑딱.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 집 안에서만은 모든 것이 그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창밖을 보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수평선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바다 위에는 이른 아침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배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린은 커피를 한 잔 내려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 널어둔 이불들이 바다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불을 거두어들이며 아린은 생각했다. 이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과 다시 어울리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준이의 기억을 아름답게 간직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린은 커피잔을 비우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햇살이 마당을 가득 채우자, 빈집도 조금은 생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아린은 준이의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두고, 세수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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