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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2부: 바다와 상처_#8. 닫힌 마음

by emilore 2025.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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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닫힌 마음

 

준이의 소라껍데기를 받은 후, 아린은 며칠 동안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작은 조개가 주는 위로와 동시에 밀려오는 슬픔이 너무 컸다. 준이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일주일 후, 아린은 다시 기록실을 찾았다. 도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날의 진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

 

"안녕." 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린아. 괜찮아?" 도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며칠 동안 못 봐서."

 

"응, 시간이 필요했어." 아린이 평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준이 일을 정리하는 데."

 

도현은 차를 우려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더 궁금한 거 있어?"

 

아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날 이후에 일이 더 궁금해. 내가 왜 그렇게 바다를 원망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마을을 떠났는지."

 

"그건..." 도현이 말을 머뭇거렸다.

 

"네가 다 봤을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의 아린은 정말 많이 변해있었다. 활발하고 밝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조용하고 어두워져 버렸다.

 

"준이 장례식 이후부터였어."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는 바다를 보는 것조차 싫어했어. 바다가 보이는 창문은 다 커튼을 쳐놓고, 해변 쪽으로는 아예 가지 않았지."

 

아린은 그때를 떠올렸다. 정말 바다가 무섭고 증오스러웠다. 준이를 삼켜버린 바다, 가족을 울린 바다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때 네가 나한테 뭔가 말하려고 했었는데, 기억나?"

 

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응... 기억해."

"뭘 말하려고 했던 거야?"

 

"그날의 진실을. 준이가 왜 바다에 들어갔는지, 내가 어떻게 구조했는지. 그리고..." 도현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준이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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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은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장례식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도현이 집에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현을 보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너는 내 얼굴만 봐도 울었어. 그리고..." 도현이 깊은 숨을 쉬었다. "너는 내가 준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어."

 

아린은 고개를 떨궜다. 사실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도현을 보면 준이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왜 준이는 죽고 도현은 살았는지, 왜 도현이 준이를 구하지 못했는지 원망했다.

 

"정말 미안해." 아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내가 너무했어."

 

"아니야. 너는 슬픔 때문에 그런 거였어. 충분히 이해해."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후로 너는 점점 더 바다를 멀리했어."

 

아린은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바다가 보이는 곳은 어디든 피했고, 물고기 요리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바다 소리가 들리는 것도 견딜 수 없어서 창문을 꽁꽁 닫고 살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떠났지."

 

"응. 그때 너는 '다시는 바다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도현의 말에 아린은 가슴이 아팠다. 18세의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도 그때 서울로 가고 싶었어." 도현이 고백했다. "바다를 보면 계속 그날 생각이 났거든. 하지만 아버지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너를 여기서 보낼 수 없었어. 혼자 떠나가는 네 모습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

 

아린은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 12년 동안 계속 여기 있으면서 뭘 생각했어?"

 

"너를 기다렸어." 도현이 솔직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때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나를 기다렸다고?"

 

"응. 매일 바다를 기록하면서 생각했어. 아린이가 언젠가 돌아와서 이 기록들을 보면서 바다를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아린은 놀랐다. 도현의 바다 기록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네." 아린이 쓸쓸하게 웃었다. "12년이나."

 

"괜찮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도현의 말에 아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이 마을을 떠나 상처받고 지쳐있을 때, 도현은 묵묵히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어떻게 지냈어?" 도현이 물었다.

 

"힘들었어." 아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외로웠어. 바다가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준이 생각이 났어."

 

"그래도 간호사가 됐잖아. 사람들을 돌보는 일."

 

"응. 그것도 준이 때문이었어." 아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이를 구하지 못했던 게 너무 후회돼서, 다른 사람이라도 구하고 싶었어."

 

도현은 아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봤어. 결국 견딜 수 없어서 그만뒀어." 아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그래서 여기로 돌아온 거구나."

 

"응.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고, 결국 준이가 있는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도현은 아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내가 여기 있어."

 

아린은 도현의 따뜻한 손을 느끼며 눈물이 났다. 12년 만에 진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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