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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3부: 관계의 틈새_#10. 서로의 그림자

by emilore 202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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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로의 그림자

 

함께 시간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나자, 아린과 도현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이 자리 잡았다. 매일 오전에 아린이 기록실을 찾아오면, 도현은 차를 준비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들이 많았다.

 

어느 흐린 날 오후, 아린은 1990년대 의료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을 보건소 설립 관련 기사들과 함께 당시 의료진들의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그 기사를 읽던 중, 아린의 손이 멈췄다.

 

"의사나 간호사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도시에서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중환자실에서 보낸 마지막 밤들, 구하지 못한 환자들의 얼굴들, 그리고 점점 무너져가던 자신의 모습까지.

 

"아린아, 괜찮아?" 도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린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아, 응... 괜찮아." 아린이 기사를 덮으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힘든 기억이 떠올랐구나."

 

아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시에서 간호사 일 할 때 이야기야. 사실... 정말 힘들었어."

 

"말하고 싶으면 해도 돼. 들어줄게."

 

아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바다와는 달리 마음속은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었다.

 

"처음 몇 년은 괜찮았어. 사람들을 돕는다는 보람도 있었고, 준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도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아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너무 많은 죽음을 봤어. 특히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는 매일이 전쟁 같았어. 최선을 다해도 구할 수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았어."

도현은 말없이 아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당시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힘들었던 게..." 아린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준이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었어. 사고로 실려온 아이들을 볼 때마다 준이 생각이 났어."

 

"그랬구나."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명의 환자를 잃기도 했어.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사람을 구하려고 간호사가 됐는데, 결국은 죽음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아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의 무력감과 좌절감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공황장애까지 생겼어. 병원에만 들어가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그만뒀어."

 

도현은 아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정말 고생 많았구나. 혼자서 그 모든 걸 견뎌내느라."

 

"그래서 여기 온 거야. 더 이상 갈 곳도 없었고, 준이가 있는 이곳에서 답을 찾고 싶었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아린이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자, 도현도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뭔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사실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신 게 맞지만... 그 전에 실종된 적이 있었어."

 

아린이 놀란 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실종?"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어.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신 거야. 며칠 후에 다른 마을 해변에서 발견됐는데..." 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상태로?"

 

"의식을 잃은 채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바다에 빠지셨다가 간신히 해변으로 밀려나신 것 같았어."

 

아린은 충격을 받았다. 도현의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기억을 잃으셨어. 최근 몇 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신 거야.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시고, 등대지기 일도 기억하지 못하셨어."

 

"그럼 그 후로는..."

 

"내가 돌봐드렸어. 대학을 휴학하고 마을에 내려와서. 아버지는 점점 쇠약해지셨고, 결국 2년 후에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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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린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고, 혼자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왜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안 했어?"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어. 그리고..." 도현이 망설이다가 계속했다. "아버지가 왜 그날 밤 바다에 나가셨는지 모르겠어서. 평소에 밤바다는 위험하다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혹시 뭔가 이상한 징조라도 있었어?"

 

"글쎄... 그날 아버지가 계속 바다를 보시면서 중얼거리시더라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고."

 

아린은 소름이 돋았다. 바다가 사람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바다를 기록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린은 도현의 바다에 대한 집착이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 너도 혼자서 많은 걸 견뎌왔구나."

 

"응.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야." 도현이 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여기 와줘서."

 

아린은 도현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상처들이 오히려 두 사람을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 참 비슷하네." 아린이 쓸쓸하게 웃었다. "둘 다 바다 때문에 상처받고, 둘 다 혼자서 견뎌왔고."

 

"하지만 이제는 함께야." 도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아린은 처음으로 앞으로의 희망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서로의 상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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