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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3부: 관계의 틈새_#9. 다시 스며드는 파도

by emilore 202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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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시 스며드는 파도

 

진실을 나눈 후, 아린과 도현의 관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린은 거의 매일 기록실을 찾았고, 도현도 그녀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지만, 점차 함께 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 자료들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아린이 어느 날 제안했다. 기록실 한쪽에 쌓여있는 오래된 신문 스크랩과 사진들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도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꽤 지루할 텐데."

 

"집에만 있으면 더 지루해. 그리고 이런 기록들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도현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 고마워. 혼자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거든."

 

그렇게 아린은 기록실의 자료 정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 쌓인 마을 신문들, 태풍이나 해일 관련 기사들, 어업 현황 자료들을 연도순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와, 이거 봐. 1995년에 마을에 돌고래들이 나타났다고 하네." 아린이 신문 기사를 보며 감탄했다.

 

"맞아. 그때 큰 화제였어.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50여 마리나 됐다고 하셨어." 도현이 옆에서 설명했다. "그때 사진도 있을 거야."

 

함께 찾아보니 정말로 돌고래들이 마을 앞바다에서 헤엄치는 사진이 나왔다. 아린은 그 사진을 보며 바다에 대해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두렵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들의 터전이기도 하다는 것을.

 

"준이가 이 사진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아린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준이는 바다 생물들 정말 좋아했잖아." 도현이 동조했다. "특히 게랑 조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준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예전에는 준이 이야기만 나와도 아린이 울거나 화를 냈는데, 이제는 따뜻한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준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 아린이 말했다. "이런 기록들에 준이 이야기도 남겨두면 어떨까?"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야. 마을 아이들의 이야기도 중요한 역사니까."

 

그날부터 아린은 준이에 대한 기록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준이가 그렸던 그림들, 일기장의 내용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준이의 모습들을 모아서 하나의 파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순자 아주머니한테 물어봤더니, 준이가 길고양이들한테 자기 간식 나눠주던 이야기를 해주시더라." 아린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혼자 못 다니는 할머니 심부름도 자주 해드렸어." 도현이 덧붙였다.

 

준이의 기록을 만들면서 아린은 동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아이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잃은 슬픔을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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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자료 정리를 하던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나기 정도였는데, 점점 세게 내렸다.

 

"오늘 비 예보 있었나?" 아린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아니, 갑작스럽네. 기압계 수치도 정상이었는데." 도현이 관측 장비들을 확인했다. "이런 날씨는 기록해둬야겠어."

 

도현은 즉시 날씨 관측을 시작했다. 비의 세기, 바람의 방향, 기압 변화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아린은 그런 도현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성실함에 감탄했다.

 

"매일 이렇게 기록하는 거야?"

 

"응. 하루도 빠짐없이. 작은 변화라도 놓치면 안 되거든." 도현이 펜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비가 더 세게 내리자, 등대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다. 근처 어선 한 척이 귀항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봐야겠어." 도현이 우비를 챙기며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갈까?"

 

"아니, 위험해. 여기서 기다려."

 

도현이 나간 후, 아린은 혼자 기록실에 남았다. 빗소리와 함께 바다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예전 같으면 무서웠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가 도현을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도현이 돌아왔다. 우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이 젖어있었고,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어선은 괜찮아?"

 

"응, 무사히 항구에 들어왔어." 도현이 우비를 벗으며 대답했다. "등대 불빛이 잘 보여서 다행이었어."

 

아린은 도현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이런 일이 자주 있어?"

 

"날씨가 갑자기 변할 때는 종종 있지. 특히 요즘 같은 계절에는."

 

도현이 젖은 머리를 닦는 모습을 보며 아린은 그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위험을 무릅쓰고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모습이 든든했다.

 

"차 끓여줄게." 아린이 말했다.

 

"고마워."

 

따뜻한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비가 잠잠해지자 바다도 조금씩 고요해졌다.

 

"도현아." 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고마워.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줘서."

 

도현은 아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혼자 하던 일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그 순간 아린은 자신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도현과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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