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갈등의 불씨
어업조합장이 떠난 후, 도현이 기록실로 돌아왔을 때 아린의 표정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도현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린아..."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 들었어." 아린이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 말이 많아진다는 거."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김 조합장님은 원래 걱정이 많으신 분이야."
아린이 드디어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실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도현아, 나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이런 소문들이 언제부터 돌기 시작했는지 알아?"
도현은 잠깐 망설였다. 사실 소문이 시작된 지는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아린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 정도 전부터."
"일주일?" 아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네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거야?"
"응... 하지만 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어?"
도현은 아린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렬해서 당황했다. "아린아, 진정해. 나는 그냥..."
"나는 그냥 뭐? 바보처럼 모르고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거야?" 아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일인데 나는 모르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소문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어."
"노력했다고?" 아린이 비웃었다. "어떤 노력을 했는데? 일주일 동안 소문은 더 커졌잖아."
도현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는 몇몇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굳어진 소문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아린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미안해.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야?" 아린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나는 네가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네."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내 편이면 왜 가만히 있었어?" 아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사람들이 나를 헐뜯는 걸 보고만 있었어?"
도현은 아린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실망과 배신감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다.
"아린아, 잠깐만..."
하지만 아린은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생각해볼게.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 건지."
"아린아!" 도현이 급히 따라가려 했지만, 아린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날 밤, 아린은 집에서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도현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컸다.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려고 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소문의 내용들이었다. 특히 준이에 대한 소문은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동생을 질투해서 위험에 빠뜨렸다는 말은 준이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이틀 동안 아린은 기록실에 가지 않았다. 도현이 몇 번 집에 찾아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을에서 장을 볼 때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누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믿고 있는지, 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사흘째 되는 날, 순자 아주머니가 집에 찾아왔다.
"아린아, 문 열어봐. 아주머니야."
아린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순자 아주머니는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들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있을 것 같아서 왔어.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거실에 앉은 순자 아주머니는 아린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아린아, 너무 마음 쓰지 마.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져."
"하지만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진짜 너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소문 안 믿어. 나도 그렇고, 다른 할머니들도 그래. 너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였잖아."
순자 아주머니의 위로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지만, 아린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했다.
"그런데 아주머니, 혹시 이런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세요?"
순자 아주머니가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사실...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있어. 한 달 전쯤에 왔는데, 그 사람이 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누구요?"
"박미경이라는 여자야.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한테 이상한 질문들을 많이 했어. 특히 너 가족 이야기를."
아린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그 사람이 왜 저에 대해 물어봤을까요?"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사람이 온 후로 너에 대한 소문이 시작됐다는 거야."
아린은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성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머니, 그 사람 어디 살아요?"
"마을 끝쪽 펜션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고 해. 아린아,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이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날 밤, 아린은 도현에게 연락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실망감이 가시지 않았다. 일단 혼자서 박미경이라는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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