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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4부: 갈라짐과 고독_#15. 떠나려는 마음

by emilore 202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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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떠나려는 마음

 

등대 사고 이후 며칠이 지나자, 아린의 마음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자리 잡았다. 도현과 함께 위기를 극복한 것은 뿌듯했지만, 동시에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박미경이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마을은 복구 작업으로 분주했다. 하지만 아린에 대한 소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등대 사고 때 도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추측들이 생겨났다.

 

"아린이가 도현이한테 접근하는 것 같아. 혼자 사는 남자한테 의존하려는 거 아니야?"

 

"글쎄, 예전부터 도현이를 좋아했다고 하던데. 이제 와서 다시 유혹하는 건 아닌가?"

 

이런 말들이 아린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진실을 알리려고 해도 사람들은 이미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아린은 집에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시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더 버티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소문은 계속 퍼지고 있었고, 도현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었다.

 

옷가지를 정리하던 중, 준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함께 '누나랑 배 타고 싶어요'라고 쓰인 그 그림이었다. 아린은 그림을 보며 눈물이 났다.

 

'준아, 누나가 여기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었다.

 

"아린아, 있어?"

 

"응, 들어와."

 

도현이 들어와서 아린이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뭐 하는 거야?"

 

"짐 정리해. 서울로 돌아가려고."

 

"갑자기 왜?" 도현이 놀라며 물었다.

 

아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여기 있어봐야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 소문도 그렇고,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소문 때문에 떠나는 거야?"

 

"그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아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너한테도 피해가 가잖아. 어업조합장님 말씀도 들었고."

 

도현은 아린 앞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중요한 건 네가 여기 있고 싶은지야."

 

"잘 모르겠어." 아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준이 때문에 왔는데, 이제는 뭘 위해서 여기 있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너를 실망시켜서?"

 

"아니야. 그건 이미 해결됐잖아." 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여기 맞지 않는 것 같아. 서울에서도 맞지 않았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그럼 어디가 네 자리라고 생각해?"

 

아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준이가 죽은 후로는 계속 떠도는 기분이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서는 계속 과거에 매여있는 것 같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도현은 아린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이곳에서 치유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더 상처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날 생각이야?"

 

"이번 주말에. 버스표도 예약했어."

 

"그럼 며칠 안 남았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린은 짐 정리를 계속했고, 도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린아."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해보자."

 

"뭘?"

 

"박미경이라는 사람 말이야. 네가 떠나면 그 사람의 목적을 영영 알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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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은 손을 멈췄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신경 쓰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른 채 떠나는 것이 찜찜했다.

 

"하지만 만나봐야 뭐가 달라져? 그 사람이 솔직하게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네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거잖아."

 

아린은 도현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동안 도망만 치며 살아왔는데, 이번에는 정면으로 맞서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알겠어. 내일 만나보자. 그리고 그 다음에 떠날게."

 

"고마워. 나도 같이 갈게."

 

"혼자 할 수 있어."

 

"아니야. 뭔가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도현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가 떠나기 전에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아서."

 

아린은 도현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도 자신의 떠남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아린은 잠들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고, 멀리 등대의 임시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 풍경을 보는 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떠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더 버텨보는 게 나을까? 아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미경을 만나본 후에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만남에서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기로 한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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