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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4부: 갈라짐과 고독_#16. 숨겨진 기록

by emilore 2025.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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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숨겨진 기록

 

박미경을 만나러 가기로 한 다음 날 아침, 아린은 먼저 기록실에 들렀다. 도현과 함께 가기 전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함께 정리했던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기록실에 들어가니 도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린은 그동안 자신이 정리했던 서가를 둘러보았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마을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도 이 작은 역사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이에 대한 기록이 담긴 파일을 꺼내어 보았다. 준이의 그림들,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일화들, 그리고 그의 짧은 생애를 담은 이야기들이 정성스럽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만큼은 자신이 떠나더라도 여기 남겨두고 싶었다.

 

파일을 정리하던 중, 아린은 서가 뒤편에 작은 상자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먼지가 쌓인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았다. 호기심에 상자를 꺼내어 열어보니, 낡은 노트 몇 권이 들어있었다.

 

첫 번째 노트를 펼쳐보니 도현의 아버지 글씨였다. 1990년대부터 기록된 등대 일지 같았다. 단순한 날씨 기록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상들도 적혀 있었다.

 

"1995년 6월 15일. 오늘 마을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왔다. 윤씨 집안인데, 두 아이가 있다고 한다. 바다 근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아린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가족이 이사 온 날의 기록이었다. 도현의 아버지가 그때부터 자신들을 지켜봤다는 것이 신기했다.

계속 읽어나가자 준이에 대한 기록들도 나왔다.

 

"2010년 7월 20일. 윤씨 집 둘째 아이가 등대에 놀러 왔다. 바다가 무섭다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아이다. 도현이와 비슷한 나이라서 잘 어울릴 것 같다."

 

"2011년 5월 3일. 준이라는 아이가 또 왔다. 이번에는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데기를 보여주었다. 정말 예쁜 것을 찾아오는 눈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린은 점점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현의 아버지가 준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2013년 8월 부분에서 아린의 손이 멈췄다. 준이가 사고를 당한 그날의 기록이었는데, 내용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2013년 8월 12일. 오늘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준이가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진실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해둔다."

 

아린은 숨을 죽이고 계속 읽었다.

 

"오후 1시경, 준이가 혼자 바다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평소와 달리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30분 후 다른 아이 한 명이 준이를 찾으러 왔다. 박미정이라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준이에게 '예쁜 조개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아린은 깜짝 놀랐다. 박미정? 지금 마을에 있는 박미경과 같은 성씨였다. 혹시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박미정은 서울에서 온 아이로, 그날 하루만 마을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 아이가 준이에게 특별한 조개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준이는 그것을 아린이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던 것 같다."

 

기록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박미정이 알려준 장소는 조류가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그 아이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준 것인지, 아니면 몰랐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준이는 그 위험한 곳에서 사고를 당했다."

 

아린의 손이 떨렸다. 준이의 사고에 다른 아이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박미정이라는 것도.

 

"사고 직후, 박미정과 그 가족은 갑자기 마을을 떠났다.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도현이가 준이를 구조하는 동안 그 아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부분에는 도현 아버지의 추측이 적혀 있었다.

 

"이 일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준이가 혼자 그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분명히 누군가의 유도가 있었을 것이다."

 

아린은 노트를 덮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박미경이 그때의 박미정과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 마을에 나타난 이유가 그때 일과 관련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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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록실 문이 열리면서 도현이 들어왔다.

 

"아린아, 일찍 왔네. 준비됐어?"

 

아린은 노트를 도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도현아, 이거 봐. 네 아버지가 남긴 기록이야."

 

도현은 노트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기록이 있었다니... 나도 처음 봐."

 

"박미정이라는 아이 기억나?"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대학교에 있었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아버지 기록이니까 사실일 거야."

 

"그럼 박미경이 그때의 박미정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네?"

 

"가능성이 높아 보여. 성씨도 같고, 시기도 맞고."

 

아린은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박미경이 마을에 나타난 이유, 자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이유, 그리고 준이의 사고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는 이유까지.

 

"도현아, 우리 지금 당장 박미경을 만나러 가자."

 

"응. 이제 진실을 밝혀야 해."

 

두 사람은 노트를 가지고 기록실을 나섰다. 드디어 8년 동안 숨겨져 있던 진실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낼 때가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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