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분노와 오해
박미경과의 만남이 끝난 후, 아린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펜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조용했다. 도현이 몇 번 말을 걸어봤지만, 아린은 고개만 끄덕이거나 간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많이 충격받은 것 같은데."
"응... 좀 혼자 있고 싶어." 아린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시간이 필요하면 충분히 가져. 내일 기록실에서 보자."
도현이 떠난 후, 아린은 집에서 혼자 앉아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해보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준이의 죽음에 또 다른 아이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 아이도 8년 동안 고통받았다는 것, 그리고 결국 죽었다는 것까지.
밤이 깊어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린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만약 그날 자신이 준이와 함께 갔다면? 만약 미정이가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만약... 수많은 만약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아린은 기록실에 가지 않았다. 도현이 집에 찾아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 순자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아린아, 어디 아픈 거야? 도현이가 걱정하더라."
"아주머니..." 아린이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순자 아주머니는 아린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퀭하게 들어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박미경이라는 사람 만났다면서?"
아린은 아주머니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박미정의 존재, 준이 사고의 진실, 그리고 미정이의 죽음까지.
순자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어린 아이도 참 불쌍하네."
"아주머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린이 울먹이며 물었다. "준이가 죽은 게 미정이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그 아이도 이미 죽었어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린아..." 순자 아주머니가 아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원망할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마. 그런다고 준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네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8년 동안 제가 느꼈던 죄책감은 뭐였어요? 도현이도 그렇고요."
그때 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린아, 나야. 문 열어줄래?"
아린은 망설였지만, 결국 문을 열었다. 도현의 얼굴에도 걱정과 피로가 역력했다.
"괜찮아? 이틀 동안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
"도현아..." 아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느꼈던 죄책감은 뭐였을까?"
도현은 거실에 앉으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느낀 죄책감이 잘못된 건 아니야. 준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 그 자체는 진짜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잖아."
"그래. 하지만 미정이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아이도 몰랐던 거야."
아린은 갑자기 화가 났다. 도현이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도현아, 너는 왜 그렇게 차분해? 8년 동안 우리가 괜히 고생한 거라고!"
"아린아,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8년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도시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아?"
도현은 아린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녀가 지금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마찬가지?" 아린이 비웃었다. "너는 여기서 평온하게 지냈잖아. 매일 바다를 보면서, 등대지기 일 하면서."
"평온했다고?" 도현의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아린아, 나도 매일 지옥이었어. 네가 떠나고 나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
"그럼 왜 나를 붙잡지 않았어? 왜 가만히 보내줬어?"
도현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너를 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내가 여기 있으면 네가 계속 그날을 떠올릴 것 같아서."
아린은 도현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배려보다 자신의 분노가 더 컸다.
"결국 다 소용없었네. 미정이라는 아이 때문이었으니까."
"아린아, 미정이를 원망하지 마. 그 아이도 피해자야."
"피해자?" 아린이 소리쳤다. "그 아이 때문에 준이가 죽었는데 피해자라고?"
순자 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말렸다. "얘들아, 그만해. 지금 서로 상처만 주고 있잖아."
하지만 아린은 멈추지 않았다.
"도현아, 너는 항상 그래.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고, 용서하려고 하고.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모르겠어!" 아린이 울면서 소리쳤다. "정말 모르겠어!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현은 아린을 안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뿌리쳤다.
"만지지 마! 지금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아린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도현과 순자 아주머니는 거실에 남겨졌다.
"도현아, 아린이를 이해해줘.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순자 아주머니가 위로했다.
"네, 알아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하지만 도현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아린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아팠고, 그녀가 혼자서 그 모든 감정을 감당하려는 것이 걱정되었다.
방 안에서 아린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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