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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5부: 진실과 화해_#20. 다시 켜진 불빛

by emilore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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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시 켜진 불빛

 

마을 어르신들과의 대화 이후, 아린의 마음에는 조금씩 평온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도현과는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하면서도,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아린은 밖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창밖을 보니 등대 쪽에서 불빛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호기심에 밖으로 나가 등대를 바라보니, 정말로 등대가 다시 작동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불빛이 바다를 훑으며 돌고 있었다. 태풍으로 고장 났던 등대가 완전히 복구된 것 같았다.

 

아린은 무의식적으로 등대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니 공사 차량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등대 관리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등대지기실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도현이 나왔다. 그는 아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린아? 여기 웬일이야?"

 

"등대가... 다시 켜진 것 같아서." 아린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응, 오늘 오후에 마지막 점검이 끝났어. 완전히 복구됐어."

 

두 사람은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난번 다툼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도현아..." 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미안했어. 너한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괜찮아. 충격받을 만했어." 도현이 따뜻하게 대답했다.

 

"등대 복구 혼자 다 했어?"

 

"기술자들이 대부분 했지. 나는 그냥 지켜본 거야." 도현이 등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험 가동해보니까 완벽하게 작동해."

 

아린도 등대를 바라보았다. 강한 불빛이 어둠을 뚫고 바다 끝까지 닿고 있었다.

 

"등대에 올라가 볼 수 있을까?"

 

도현은 잠깐 망설였다. "위험하지 않을까?"

 

"구조 보강 공사도 다 끝났다고 했잖아. 그리고... 등대에서 바다를 한번 보고 싶어."

 

도현은 아린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같이 올라가자."

 

두 사람은 등대 안으로 들어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새로 보강된 구조물은 전보다 훨씬 안전해 보였다. 등대 꼭대기에 도착하니 360도로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와..." 아린이 감탄했다. "정말 멀리까지 보이네."

 

"응. 날씨가 좋아서 수평선까지 다 보여." 도현이 설명했다.

 

아린은 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무섭기만 했던 바다가 이제는 다르게 느껴졌다. 여전히 두렵긴 했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도현아, 고마워."

 

"뭐가?"

 

"이 등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니까. 네가 하는 일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도현은 아린의 말에 뿌듯해했다. "아버지가 해오신 일이니까. 나는 이어받은 거뿐이야."

 

"아저씨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등대 불빛이 돌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아린은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불빛을 보고 있으니까 희망 같은 게 느껴져."

 

"희망?"

 

"응.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거잖아. 마치..." 아린이 잠깐 말을 멈췄다. "마치 내게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아."

 

도현은 아린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보다 차분하고, 무언가 결심을 한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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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아, 혹시..."

 

"응?"

 

"여전히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야?"

 

아린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 남기로 했어."

 

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응. 마을 사람들이 말해줬어. 준이에 대한 진짜 기억들을.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도망칠 이유가 없다는 걸."

 

"그럼 앞으로 뭘 할 거야?"

 

아린은 등대 불빛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준이의 기억과 함께."

 

"기록실 일은?"

 

"계속하고 싶어. 네가 괜찮다면." 아린이 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이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게 훨씬 좋아."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고 상쾌했다.

 

"도현아."

 

"응?"

 

"지난번에 한 말... 너를 밀어낸 말들 정말 미안해. 나는 화풀이했는데, 너는 8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둘 다 힘들었던 거야."

 

"그래도 말하고 싶어." 아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항상 나를 이해하려고 했고, 보호하려고 했어. 고마워."

 

도현은 아린의 손을 잡았다. "나야말로 고마워. 다시 돌아와줘서."

 

등대 불빛이 다시 그들을 비췄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웃고 있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아." 아린이 말했다.

 

"응. 우리 함께 해보자."

 

등대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평화로웠다. 여기저기 집들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따뜻해 보였다. 아린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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