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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5부: 진실과 화해_#19. 마을의 기억

by emilore 202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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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을의 기억

 

일주일이 지났다. 아린은 여전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도현과의 연락도 끊은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미경이 갑자기 마을을 떠난 후로 그녀에 대한 소문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아린의 상태는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순자 아주머니는 매일 아린의 집에 음식을 가져다주었지만, 대화다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아린은 고맙다는 말만 할 뿐, 자신의 마음은 열어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이장님이 순자 아주머니를 찾아왔다.

 

"순자 씨, 아린이 상태가 어때요?"

 

"글쎄요, 영 좋지 않아 보여요.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말도 거의 안 해요."

 

"그래서 말인데..." 이장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을 어르신들과 상의해봤는데, 아린이한테 정말 필요한 건 우리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는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준이에 대한 진짜 기억들 말이에요. 그동안 소문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준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하고 있잖아요."

 

순자 아주머니의 눈이 밝아졌다. "좋은 생각이에요. 언제 해볼까요?"

 

"내일 오후에 아린이 집으로 몇 분이 찾아가는 게 어떨까요? 너무 많이 가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다음 날 오후, 순자 아주머니와 함께 마을의 김 할머니, 박 아저씨, 그리고 이장님이 아린의 집을 찾았다. 아린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지만, 어르신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린아, 우리가 갑자기 와서 놀랐지?" 이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차라도 끓여드릴까요?"

 

"괜찮아. 우리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거든."

 

사람들이 거실에 둘러앉자, 김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린아, 네가 요즘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래서 우리가 준이에 대해 기억하는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어서 왔어."

 

아린은 고개를 숙였다. 준이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

 

"준이는 정말 착한 아이였어." 박 아저씨가 말했다. "내가 어선에서 돌아올 때마다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곤 했지. '아저씨, 오늘은 무슨 고기 잡았어요?' 하면서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보던 게 생각나."

 

김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우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꼭 인사했지. 어찌나 예의바른지. 가끔 길에서 주운 예쁜 돌멩이나 조개껍데기를 가져와서 보여주기도 하고."

 

"준이가 우리 가게에 심부름 올 때도 있었는데," 이장님이 추가했다. "돈을 잘못 받아도 꼭 다시 가져다줬어. 정직한 아이였지."

아린은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 준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아이였는지 새삼 느꼈다.

 

"그런데 말이야," 김 할머니가 계속했다. "준이가 죽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너를 원망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야."

 

"어?" 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았어. 다만 너무 안타까웠을 뿐이지. 좋은 아이를 잃었고, 너도 동생을 잃고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박 아저씨도 동조했다. "맞아. 사고라는 건 누구 탓도 아니야. 특히 준이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래."

 

"사실 우리도 알고 있었어." 이장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날 준이가 혼자 바다에 갔다는 걸. 네가 함께 가지 않았다는 것도."

아린은 놀랐다. "알고 계셨어요?"

 

"응. 마을이 작으니까 누가 어디 가는지 다 보이거든. 그날 준이가 혼자 해변으로 향하는 걸 몇 사람이 봤어."

 

"그럼 왜 그동안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순자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네가 너무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더 상처받을까 봐 조심스러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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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가 아린의 손을 잡았다. "아린아, 준이 일은 정말 안타까운 사고였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박미정이라는 아이도 몰랐던 거고, 너도 몰랐던 거고."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박 아저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바다는 원래 위험한 곳이야.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그게 바다의 속성이거든."

 

이장님이 덧붙였다. "중요한 건 준이가 어떤 아이였는지야. 그 아이는 누나를 위해서 선물을 찾으러 간 거잖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었어."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김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여기 돌아온 것도, 준이가 부른 게 아닐까?"

 

아린은 할머니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준이는 분명히 원하지 않을 거야." 순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누나가 자신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는 걸. 그 아이가 원하는 건 누나가 행복한 거야."

 

"맞아." 이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가 살아있다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거야. '누나, 이제 그만 슬퍼하고 행복하게 살아요'라고."

 

아린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준이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눈물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린이 울면서 말했다.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김 할머니가 말했다. "준이 같은 좋은 아이를 키워줘서."

 

"그리고 다시 우리 마을로 돌아와줘서." 박 아저씨가 덧붙였다.

 

그날 밤, 아린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준이의 죽음이 정말로 단순한 사고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준이는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고, 그 사랑은 자신에게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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