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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시간

6부: 새로운 시작_#21. 작은 서재의 문

by emilore 202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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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작은 서재의 문

 

등대에서의 화해 이후, 아린은 다시 기록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단순히 도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역할을 찾고 싶었다.

 

"도현아, 제안이 하나 있어." 어느 날 오후 아린이 말했다.

 

"뭔데?"

 

"기록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면 어떨까? 마을 사람들도 자유롭게 와서 자료를 볼 수 있게 하고."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야.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 자료들을 더 정리하고,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고. 그리고..." 아린이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준이 같은 마을 아이들의 이야기도 더 많이 모으고 싶어."

 

"마을 아이들의?"

 

"응. 준이 기록을 만들면서 느꼈거든. 아이들의 이야기야말로 마을의 진짜 역사인 것 같아. 그런데 어른들의 기록은 많지만, 아이들 시각에서 본 마을 이야기는 별로 없잖아."

 

도현은 아린의 제안에 깊이 공감했다. "정말 의미 있는 일이겠네. 어떻게 시작할까?"

 

"일단 마을 어르신들한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지금 아이들에게도 마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고."

 

그렇게 해서 아린과 도현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린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수집했고, 도현은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첫 번째 인터뷰는 김 할머니와 함께였다.

 

"할머니, 어린 시절 이 마을은 어땠어요?"

 

"아이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시끌벅적했지. 아이들이 바글바글했거든." 김 할머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들 바닷가로 달려가서 해질 때까지 놀았어."

 

"어떤 놀이를 했어요?"

 

"조개 줍기, 게 잡기, 모래성 쌓기... 그리고 파도 타기도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했는데, 그때는 무서운 줄 몰랐어."

 

아린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준이도 그런 평범한 일상을 즐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위험한 곳이지만,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 아저씨와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릴 때는 태풍이 오면 온 마을이 하나가 됐어. 어른들은 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아이들은 집 안에서 촛불 켜놓고 이야기를 들었지."

 

"무슨 이야기요?"

 

"바다에 관한 전설들. 용왕님 이야기, 인어공주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다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내용이었어."

 

아린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자 동반자였다. 때로는 위험하지만, 언제나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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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아린과 도현은 수집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작은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기록실 한쪽 벽면에 사진들과 이야기들을 전시하고, 마을 사람들을 초대했다.

 

전시회 개막일, 많은 사람들이 기록실을 찾았다. 평소에는 조용했던 기록실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머, 이게 우리 어릴 때 사진이네!" 한 아주머니가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야기도 내가 한 거야. 이렇게 정리해놓으니까 더 생생하네." 이장님이 뿌듯해했다.

 

그런데 전시를 보던 순자 아주머니가 아린에게 다가왔다.

 

"아린아, 준이 이야기도 여기 있구나."

 

"네. 할머니들께서 들려주신 준이에 대한 기억들이에요."

 

순자 아주머니는 준이의 사진과 글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보니까 준이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구나."

"그래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준이를 기억하고 계세요."

 

"너도 이제 괜찮아 보여. 예전의 밝은 모습이 돌아온 것 같아."

 

아린은 순자 아주머니의 말에 미소지었다. 정말로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준이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전시회를 보던 도현이 아린에게 다가왔다.

 

"어때? 반응이 좋은 것 같은데."

 

"응.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 있어 해주셔서 놀라워."

 

"그럼 이제 정말 '해안 마을 어린이 기록보관소'를 만들어볼까?"

 

아린의 눈이 밝아졌다. "정말?"

 

"응. 네가 관장을 하고, 나는 기술 지원을 하는 거야."

 

"관장이라니... 너무 거창한데."

 

"아니야. 네가 제일 적합해. 아이들 마음을 잘 이해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잖아."

 

아린은 도현의 제안에 가슴이 뛰었다. 자신만의 일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럼 준이도 이 기록보관소의 첫 번째 아이가 되는 거네."

 

"응.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이야기도 계속 모을 수 있을 거야."

 

그날 밤, 아린은 집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준이가 자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은 소라껍데기가 아니라 이런 새로운 시작이었을 것이라고. 준이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였다.

 

기록실 창밖으로 등대 불빛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그 불빛처럼, 자신의 새로운 삶도 안정적으로 계속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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