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달빛 아래의 약속
기록보관소가 정식으로 문을 연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가을 밤, 아린과 도현은 하루 일을 마치고 바닷가를 걸었다. 보름달이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파도는 잔잔하게 해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네." 아린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내 마음이. 예전에는 이 바다가 그냥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름답다고 생각해."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예전에는 의무감으로 바다를 지켰다면, 지금은 정말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앉아 달빛이 바다에 만든 길을 바라보았다. 등대 불빛이 규칙적으로 돌아가며 바다를 밝히고 있었다.
"도현아." 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고백할 게 있어."
도현이 아린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사실 서울에 있을 때, 가끔 너 생각이 났어. 화가 나서 마음을 닫아놨지만,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어."
"나도." 도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매일 등대에서 바다를 보며 언젠가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정말?"
"응. 바다가 널 다시 불러올 거라고 생각했어. 준이도 네가 여기 있기를 바랄 거라고."
아린은 도현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12년이나 기다렸구나."
"기다리는 게 아니었어. 그냥... 확신이었어."
아린은 준이가 그려준 소라껍데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달빛 아래에서도 그 진주빛 광택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제 알겠어. 준이가 정말 주고 싶었던 선물이 뭔지."
"뭔데?"
"나와 너의 만남. 준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가까워지지 못했을 거야."
도현은 아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린아, 나는..."
"나도 알아." 아린이 먼저 말했다. "우리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거."
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부터 알았어?"
"확실하게는 등대에서 함께 있을 때부터. 위험한 상황에서도 네가 내 곁에 있어서 든든했어."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이었어. 중학생 때."
아린이 놀라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응. 하지만 그때는 너에게 준이 일이 있었고, 나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어."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서야 진짜 시작인 것 같았다.
"도현아, 약속하자."
"무슨 약속?"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 견디자."
"응. 그리고 서로 솔직하자.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아린이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 걸자."
도현도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유치하다."
"상관없어. 중요한 약속이니까."
바람이 불어와 아린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도현이 그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아린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첫 번째 고백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연애한다고 마을에서 또 소문 나는 거 아니야?" 아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걸? 우리가 매일 함께 다니는데."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오늘부터지."
도현이 아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럼 기념일은 오늘로 하자."
"응. 보름달이 있는 날이니까 기억하기도 쉽고."
파도가 두 사람의 발끝까지 와서 차가운 물거품을 남기고 갔다. 하지만 둘 다 춥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 날 여기 와서 달을 보자." 아린이 제안했다.
"좋아. 그리고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그때는 손주들도 함께 데리고 와서."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해?"
"당연하지. 난 계획적인 사람이야."
두 사람은 한참 더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설렘이 밤바다처럼 깊고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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