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달빛이 머무는 시간

6부: 새로운 시작_#24. 머무는 시간

by emilore 2025. 10. 19.
반응형

#24. 머무는 시간

 

1년 후, 해안 마을 어린이 기록보관소는 인근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문화 공간이 되었다. 아린은 정식으로 관장이 되었고, 도현은 등대지기 일과 함께 기록보관소의 기술 관리를 담당했다.

 

"아린 선생님, 오늘도 인터뷰 있어요?" 마을 초등학교 3학년인 지훈이가 기록보관소에 들어오며 물었다.

 

"응, 오늘은 네 할아버지께서 오시기로 했어. 지훈이도 함께 들을래?"

 

"네! 할아버지 어린 시절 이야기 궁금해요."

 

아린은 아이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기록보관소를 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했다. 처음에는 어른들만 관심을 보였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자신들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대학에서 온 연구진들과 회의가 있었다. 아린이 만든 '어린이 시각 마을 기록'이 학술적으로도 의미 있다는 평가를 받아서, 공동 연구를 제안받은 것이었다.

 

"정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네요." 교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런 자료들이 있으면 지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을 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회의가 끝나고 아린은 등대로 향했다. 도현이 저녁 점검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떻게 됐어?" 도현이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연구 지원금도 받고, 논문도 공동으로 쓰기로 했어. 우리 기록보관소가 유명해지겠는걸?"

 

"자랑스러워. 1년 만에 이렇게 성과를 내다니."

 

아린은 도현에게 다가가 등대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 불빛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아."

 

"맞아. 특히 아이들에게."

 

저녁이 되자 두 사람은 기록보관소로 돌아가 오늘의 일기를 썼다. 이제는 일상이 된 루틴이었다.

 

"오늘 지훈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니, 준이 생각이 났어. 준이도 저렇게 컸다면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 하지만 슬프지 않았어. 오히려 준이가 지훈이 같은 아이들을 통해 계속 살아있는 것 같았어." - 아린의 일기

 

"등대 점검을 하다가 생각했어. 이 불빛이 매일 바다를 비추듯이, 아린이와 내가 하는 일도 마을을 밝히고 있는 것 같아. 아버지가 꿈꾸던 '기억을 지키는 일'이 현실이 되고 있어." - 도현의 일기

반응형

일기를 교환해서 읽은 후, 아린이 말했다.

 

"도현아, 내가 여기 온 지 벌써 2년이 됐네."

 

"정말 빠르게 지나갔지. 처음에는 며칠 있다가 떠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여기가 진짜 내 집 같아."

 

도현이 아린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계속 여기 있을 거지?"

 

"당연하지. 우리가 시작한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걸."

 

창밖으로 마을의 불빛들이 보였다. 어릴 때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작은 마을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이 되었다.

 

"아린아, 결혼 이야기는 언제 할 거야?" 도현이 갑자기 물었다.

 

아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급하지 않잖아. 우리 이미 부부처럼 지내고 있는걸."

 

"그래도 정식으로 하고 싶어.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럼 내년 봄에 하자. 준이 기일이 지나고."

 

"좋아. 그때까지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고."

 

밤이 깊어가자 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린은 집에 도착해서 준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준이의 물건들과 함께 자신의 새로운 추억들도 채워져 있었다. 기록보관소 관련 서류들, 마을 아이들이 준 편지들, 도현과 찍은 사진들.

 

창밖으로 등대 불빛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그 불빛을 보며 아린은 생각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중요한 것들은 영원히 머물러 있다는 것을. 준이의 사랑, 마을 사람들의 따뜻함, 그리고 도현과의 소중한 인연처럼.

 

아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12년 전 이 방에서 울며 떠났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 준이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준아, 누나 이제 정말 괜찮아. 네가 바라던 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는 무서웠던 그 소리가 이제는 자장가 같았다. 아린은 그 소리를 들으며 평온하게 잠에 들었다.

 

달빛이 마을을 은은하게 비추고, 등대 불빛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머물며, 동시에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반응형